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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시간은 성찰의 시간”… 이석태 전 헌법재판관 퇴임 인터뷰

법률신문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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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관으로서의 삶은 성찰의 과정이었습니다."

지난달 16일 약 4년 7개월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이석태(70·사법연수원 14기) 전 헌법재판관을 19일 서초대로 법률신문사 본사에서 만나 소회를 묻자 이같이 답했다.
"주어진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료 재판관들과 계속 대화하고 헌법연구관 등이 제공하는 보고서, 토론 자료를 보며 제 생각이 적절한지 고민했습니다.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시간은 '성찰의 시간'이었어요. 과거에 가졌던 생각이 흔들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변호사는 사건 선택에 재량이 있지만 재판관은 주어지는 사건을 다 맡아야 하는 차이가 있죠. 또 모두 국민들의 관심이 크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고요. 대리인으로서는 다 살펴볼 수 없었던 측면들에 대해 모든 이론적 검토를 거치고 외국의 입법례까지 다방면으로 살펴봐야 했죠. 평의에서는 그렇게 9명의 재판관이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다른 재판관님들께 기댄 바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전 재판관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 멤버로, 이후 회장을 지냈다. 피고인의 형사소송 절차에서의 권리나 차별 문제 해소 등을 위해 활동한 그는 진보 성향의 법조인으로 알려져 있다. 참여연대 공동대표와 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 등을 맡아 시민운동에 관여해 왔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전 재판관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유서대필 사건'에서는 피고인 강기훈씨를 23년간 변호해 재심을 이끌어 내 무죄를 받아냈고, 민법상 동성동본 금혼 규정과 호주제 위헌 사건을 대리하기도 했다.

그런 이 전 재판관이 어떻게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는지 궁금했다. "당초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했는데 우연히 학내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전공의 학생들과 대화하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문학을 새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3학년 때 자퇴를 하고 인문사회계열로 재입학했습니다. 학교에 다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에 입대했는데,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제약이 큰 상황 속에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새로 하게 됐습니다. 그러한 시간을 거쳐 법학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목표가 있었다기 보다는 주변에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친구도 있었고, 사회의 골격을 이해하고도 싶었습니다."
이 전 재판관은 사법시험 합격 후 헌법재판관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변호사로만 활동했다. 그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었다. "민주항쟁 후 변호사로서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모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0년대 쯤부터 '인권 변호사'라 불리며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위해 변론하던 선배 그룹이 있었습니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도 한 분이고요. (그 모임에는) 젊은 변호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같이 하자는 공감이 생겼고, 결국 1988년 같은 뜻을 가진 변호사 50여명이 모여 민변을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시민단체들이 태동하던 때여서 자연스럽게 시민사회 각 방면에 법적 조언이 필요해졌고 민변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강기훈씨의 사건은 당시 사회적 관심이 가장 컸던 사건입니다. 변호인단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고 강씨가 구속되기 전부터 관여했기 때문에 그가 무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유죄가 됐죠.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한데,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결국 무죄가 됐고 강기훈씨는 그보다 훨씬 지나 23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됐습니다. 어려운 사건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시민사회에 관여할 수 있도록 이끈 신념은 무엇이었까. 그는 '어떤 사람이 사회의 발전에 대해 진심으로 애쓴다면 사회는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고 말했다. "저는 비관적인 낙관론자입니다. 사회 면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는 점에서 비관론자고요. 다만 굴곡은 있었지만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즉 여러 우여곡절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사회는 전진하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미미하지만 제가 법률가로서 참여할 자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점에서 낙관적입니다. 과거에 사무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상치 못하게 사무실 적자를 면하게 하는 사건들을 맡아 도움을 받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사회의 굵직한 사건을 대리했던 변호사로서의 경험은 헌법재판관이 된 그에게 하나의 자양분이 됐다. "이른바 달동네가 없어지고 서울 시내 각지에 아파트가 들어섰을 때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용산 참사와 비슷한 상황이었죠. 주민들이 저항하고 정부와도 마찰이 생겼는데 저는 현장에서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변호사의 업무는 의뢰인과의 과정에서 이뤄지고, 저는 시민사회 활동을 하면서 경험을 쌓았어요. 경험을 통해 헌재에 주어지는 사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건축 사건의 경우, 주거권의 관점에서 소수의견을 쓰게 되었습니다."
4년 7개월 임기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자 이 전 재판관은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서 단순위헌 의견을 냈던 것과 지난해 '피성년후견인' 공무원 당연퇴직 위헌 결정에서 위헌 입장에 섰던 것 등을 꼽았다. 공무원이 질병 등으로 성년후견을 받게 되면 당연히 퇴직한다는 국가공무원법 규정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이었다. 이어 2021년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진술이 담긴 영상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들었다. 19세 미만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진술이 수록된 영상물을 조사과정에 동석했던 신뢰관계인의 인정만으로 재판에서 곧바로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조항은 위헌이라는 결정이었다. 이 결정 이후 법조에서는 급히 피해자 보호를 위해 대응책을 마련할 만큼 파장이 컸다. "인권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 온 변호사로서 여성 후배들과도 함께 일해왔는데, 여성 인권적 측면에서는 후퇴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고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또한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미성년인 여성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영상을 찍는 것, (나아가) 피해 상황을 다시 이야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대한 여건을 만들어 가면서 최소한도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위헌 의견을 가진 재판관들은 보았습니다."

저는 비관적 낙관론자...
사회문제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지만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보다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간다 믿어
더 발전하려면
권력은 보다 분산되고 시민참여는 보다 많아야

이 전 재판관의 퇴임으로 현재 헌재에는 9명의 재판관 모두가 법관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 가운데 여성 재판관은 3명으로, 전체의 3분의 1이다. 다양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금 국민추천위원회가 있는데, 최종 후보군 자체가 다양하게 추려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현재로써는 당초 추천에 다양성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법조일원화가 완전히 정착되면 어느 정도 나아질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조일원화의 성격상 법관 자체가 어느 하나의 경력만이아니라, 다양한 경력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인권변호사로서, 헌법재판관으로서 사회적 갈등의 장소에 함께했던 이 전 재판관에게 앞으로 사회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 지향해야 할 점에 대해 물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권력은 보다 분산되는 쪽으로, 시민 참여는 보다 많은 쪽으로' 하는 것이 민주적 원칙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검찰수사권의 경우에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대법원이 추진했던 압수·수색영장 대면심리 관련 형사소송규칙 개정안도 마찬가지죠. 이러한 측면에서 과거 공판중심주의 도입은 법조의 큰 변화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여러 면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사법부의 경우에는 올 하반기 새로운 대법원장이 취임하고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들의 민주적 사법에 대한 희구를 사법부가 잘 읽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연 기자 sypark@lawtimes.co.kr